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시" 줄거리 특징 후기 결론

by lagom1 2025. 3. 21.
반응형

시

 

시 (Poetry, 2010)는 이창동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영화로, 세상의 폭력과 인간의 양심, 기억과 소멸, 그리고 ‘시’라는 단어가 가진 본질적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거대한 서사나 극적인 구성이 아닌, 일상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고요한 충격으로 관객을 흔든다. 주인공 미자의 마지막 여정은 곧 한 인간이 진실을 감당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조용한 선언이다.

줄거리

양미자(윤정희)는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손자와 함께 살아간다. 그녀는 조용하고 점잖은 사람이며, 노인의 일상을 그대로 체화한 존재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특별한 사건은 없다. 그녀는 고요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마지막 구절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문화센터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듣기로 결심하면서 그녀의 내면에 새로운 감각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상의 사물들, 나무, 꽃, 사과 한 알, 흐르는 강물 등 무심히 스쳐갔던 것들에 시선이 머물기 시작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강사의 말이 그녀를 깊이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 감각의 여명이 열리는 순간, 동시에 세상의 어둠도 그녀에게 밀려온다. 손자가 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 소녀를 집단적으로 성폭행했고, 그 소녀는 결국 자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은밀하게 모여 돈을 모으기로 하고, 학교는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 한다. 미자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철저히 침묵을 강요당한다. 그녀는 자식 세대의 부재 속에 유일한 보호자로 손자를 책임져야 하지만, 동시에 진실과 침묵 사이에서 스스로를 밀어넣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 이 세계를 다시 보고 싶어 했지만, 보면 볼수록, 이 세계는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한 여정을 현실을 고백하는 여정으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특징

‘시’는 이창동 감독 특유의 미학이 가장 절제되고 완성도 있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집단적 외면, 제도적 침묵, 도덕의 타협을 거의 어떤 설명도 없이 화면 안에 고요하게 쌓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윤정희의 연기는 상징적이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고, 감정은 침묵 속에서 자라고, 마침내 고백으로 도달한다. 노년 여성의 시선으로 본 세계는 결코 부드럽지 않으며, 오히려 폭력적이고 둔감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끝까지 시를 쓰고자 하는 그녀의 몸짓은 반드시 증언해야 하는 무엇을 향한 마지막 투쟁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클로즈업이나 음악적 감정 과잉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실의 간극과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관객은 그 속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은유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며, 결국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시적인 언어나 장면을 일부러 배제한 이 영화의 전략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자체를 가장 시적인 미디어로 바꾸어버린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를 언어가 아닌 태도와 선택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후기

‘시’를 처음 보았을 때의 침묵은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침묵과는 전혀 다르다. 처음엔 등장인물의 말이 적고 사건이 적어서 조용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을 보고 나면 그 조용함은 침묵의 무게로 바뀌어 마음속에 짙게 가라앉는다. 관객은 어떤 쾌감도, 카타르시스도 얻지 못한 채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묵직한 반문을 떠안게 된다.

"나는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나의 손자를 감쌀 수 있을까, 아니면 진실을 택할 수 있을까?",

"시란 무엇인가? 고백인가, 회피인가, 위로인가?" 이 영화는 관객이 입장을 선택하도록 방치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누구도 안심할 수 없고, 누구도 쉽게 이 영화를 떠날 수 없다. 또한, 이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 사회의 구조와 침묵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렇기에 ‘시’는 어느 순간 다시 꺼내어 읽어야 할 사회적 시(詩)요, 윤리적 기록이기도 하다. 윤정희 배우의 마지막 필모그래피이자 그녀가 남긴 가장 조용한 목소리는 세월이 지나도 한 줄 시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결론

「시」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관객 각자의 내면을 향해 가만히 던져진다. 시란 무엇인가. 세상을 아름답게 쓰기 위한 것인가, 진실을 직면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잊히지 않기 위한 것인가. 이 영화는 윤리적 침묵과 미학적 언어 사이에서 한 사람의 선택을 보여준다. 그 선택은 비록 조용하고 연약하지만,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는 유일한 증언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마지막 시를 들을 수는 없지만 그 시가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는 조용히, 그리고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시』는 어떤 말보다도 조용하게 그러나 잊을 수 없도록 우리에게 남아 있는 영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