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Burning, 2018)」은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선보인 장편영화로,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하여 한국 사회의 불안, 계급, 욕망, 그리고 실종된 진실에 대한 문학적이며 미스터리한 탐구를 시도한 작품이다. 주연을 맡은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세 배우의 서늘하면서도 모호한 연기와 함께, 영화는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끝없이 흔들며 관객의 인지와 감정을 시험한다. ‘버닝’은 사건의 해석이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선 그 자체를 중심에 둔 영화다.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상상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점차 영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불안을 마주하게 된다.
줄거리
세 사람의 기묘한 삼각 구조
종수(유아인)는 파주 외곽의 오래된 집에서 혼자 지내며 글을 쓰고자 하는 청년이다. 서울에서 알바 중이던 그는 어릴 적 동네 친구였던 해미(전종서)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해미는 달라져 있었고, 종수는 그녀에게 이끌리듯 호감을 느낀다.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며 고양이 ‘보일 듯 말 듯한 존재’를 부탁하고, 종수는 그녀의 집을 드나들며 어딘가 불완전한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왔을 때, 곁에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잘 차려입은 남자가 있었다. 벤은 수상할 정도로 여유롭고, 자신의 일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종수에게 친구처럼 다가가지만, 종수는 해미와 벤 사이의 알 수 없는 기류에 불편함을 느낀다. 벤은 해미를 ‘심심풀이’라 부르고, 해미는 점점 무기력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해미가 완전히 사라진다. 연락도, 흔적도, 설명도 없이. 종수는 그녀를 찾기 시작하며 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벤은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기묘한 고백을 한 적 있고, 그 말은 점점 실제 범죄에 대한 은유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이후 종수는 집착적으로 벤의 주변을 추적하고,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정의를 완성하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 결말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본 것은 진실일까, 아니면 종수의 상상 속 정의였을까.
특징
1) 명확한 진실 없이 끝나는 서사
‘버닝’은 결코 친절한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모든 정보는 등장인물의 시선을 통해 왜곡되거나 편집되며, 그로 인해 진실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해미가 진짜 고양이를 키웠는지, 벤이 진짜 살인을 저질렀는지, 종수의 마지막 선택이 정당했는지 — 이 모든 것은 영화를 보는 이의 해석에 맡겨진다. 이러한 구조는 현대 사회의 정보 과잉 속에서 진실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우리는 끊임없이 뉴스, 사건, 사실을 접하지만 그 이면의 진실은 도달할 수 없는 채로 불안과 분노만 증폭되는 구조 속에 살아간다.
2) 인물의 말보다 행동을 중심으로 구성된 플롯
이창동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인물의 대사나 심리 묘사보다, 그들의 행동과 시선, 정적인 장면을 통해 심리를 드러낸다. 유아인의 얼굴은 언제나 모호하고, 전종서는 감정을 터뜨리지 않고, 스티븐 연은 모든 것을 유희처럼 다룬다. 관객은 그들의 진심을 읽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의 표면은 더 단단하게 봉인된 채 남는다.
3) 현대 한국 사회의 무력감과 계층적 분열
종수는 전형적인 ‘잉여’ 청년이다. 꿈은 있지만 방향은 없고, 기회는 없지만 욕망은 있다. 반면 벤은 설명되지 않는 ‘여유’와 ‘권력’을 가진 남자다. 그는 상류층의 허무를 대표하며, 해미와 같은 불안정한 존재들에 대한 소비적 태도를 가진다. ‘버닝’은 해미의 실종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어떻게 개인의 존재를 삼키는가를 조용히 드러낸다. 그리고 종수는 그 구조 속에서 결국 폭력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변모한다.
후기
‘버닝’을 본 뒤 남는 것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다. 그 이야기 주변을 둘러싼 여백이다.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정답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명확한 해석을 거부한다. 그 결과, 관객은 자신의 감정, 가치관, 현실 인식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를 보게 된다. 누군가는 ‘종수’의 시선에 동화되어 그의 분노와 폭력을 정당하게 여긴다. 누군가는 벤이 단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일 뿐이며 증거도 없이 결말을 밀어붙이는 종수의 시선에 불안을 느낀다. 또 누군가는 해미가 실종되었는지도, 애초에 존재했는지도 의심하게 된다. 이처럼 ‘버닝’은 장르의 전형을 파괴하면서도, 장르적 긴장을 유지하는 역설적인 미스터리다. 스릴러 같지만 범인이 없고, 멜로 같지만 사랑이 없고, 드라마 같지만 감정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에서 ‘버닝’은 현대인의 고독, 무력감, 분노, 상실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작품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종수가 차 안에서 옷을 벗는 장면은 해석을 넘어선 이미지다. 그것은 자유인가? 광기인가? 자신의 살을 드러낸다는 행위는 그가 오직 그 순간에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는 비극적 자각처럼 다가온다.
결론
「버닝」은 현대 한국 사회의 감정적 온도를 가장 정확하게 시각화한 영화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라지는 존재들, 말해지지 않는 감정들,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불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영화가 사건을 말하는 매체가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침묵과 시선을 포착하는 예술임을 증명했다. 그 결과, ‘버닝’은 누군가에겐 불편한 영화가 되었고, 누군가에겐 시대의 증언이 되었으며, 또 누군가에겐 단지 아무것도 아닌 듯 지나간 영화로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영화는 한 번도 명확하지 않았던 감정을 말 대신 이미지로 남겨두고, 관객이 그 감정에 이름 붙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예술에 요구해야 할 유일한 정직함일지도 모른다.